
2001년 9월 11일 오전 8시 뉴욕 맨하튼,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뉴욕 증권 거래소의 브로커들은 개장하기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지하철은 젊은 사무원들을 실어 나르느라 바빴고, 타임 스퀘어에서는 삼성의 애니콜 휴대폰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모두 평소와 같은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오전 8시 46분, 보잉 767 아메리칸 항공 11편이 1WTC(제 1 세계 무역 센터, 통칭 북쪽 쌍둥이 빌딩)에 충돌한다. 이날 이후 미국은 절대 전과 같지 않았다.
공격 직후 정보 과잉으로 반 마비 상태에 빠진 미 행정부 조직은 사태를 곧바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내 모든 증거는 이미 1993년에도 WTC를 붕괴 시키려다 미수로 그친 바 있는 유명 테러조직 알 카에다를 지목했다.
오사마 빈 라덴

복수귀가 된 미국
몇 년전 넷플릭스에서 미군 드론 조종사에 다룬 다큐가 생각났다. 당시 상황실에는 911 테러 당시 무너지는 WTC의 사진과 글귀 하나가 놓여있었다고 한다.
잊지 마라 Never Forget
영화 초반부도 CIA 요원이 알 카에다의 연락책을 고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공식적으로는 미국은 어떤 기관에서도 고문을 하지 않는다는 방침이었지만, 언론이나 국회에서 감시가 힘든 해외 주둔 미군부대에서 고문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처음 고문을 본 주인공 마야는 깜짝 놀라지만, 이내 용의자에게 강하게 나서며 이 인물이 절대 쉽지는 않을 것이란 것을 보여준다.

테러 용의자들은 다양한 루트로 체포되었다. 일부는 미국 본토에서, 일부는 아프간과 파키스탄에서 체포되었으며, 전 세계에 퍼져있는 미군, CIA의 수용 시설로 퍼져 이감 되었다. 특히 유명했던 시설은 쿠바 관타나모 해군 기지였다. 이들에 대한 고문은 2002년에서 2007년 사이에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들이 CIA의 비밀 시설에서 고문을 당한다는 소식이 점차 언론을 타고 보도되기 시작했고, 여론의 압박을 받은 미국 행정부는 결국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고문 금지 행정 명령을 발효하는데 이르렀다.
체포된 테러 용의자들의 이후 처치도 곤란했다. 이들은 미국인이 아니었기에 정치 외교적으로 민감했기 때문이다. 이들과 얽힌 사법, 외교, 정치, 군사가 아주 복잡하게 꼬여버린 이들에 대한 재판은 길어질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유명 테러 용의자 중 한명인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는 2003년에 미국에 신변이 확보되었지만, 수십년 넘게 정치적 이유로 제대로 된 재판을 하지 못하다 작년에 이르러 겨우 형량 합의에 도달했다.
헌터킬러
영화에서는 실제 테러 사건들을 적절히 엮어 구성했다. 예를 들어 이슬라마바드의 메리엇 호텔 테러, 아프가니스탄의 캠프 채프먼 테러이다. 이 외에도 마드리드, 런던 테러 등이 지나간다.

캠프 채프먼 테러는 2009년 CIA요원 7명이 알카에다의 이중 스파이 후맘 칼릴 아부물랄 알발라위의 폭탄 테러에 희생된 사건이다. 그는 요르단인 의사였으며, 알카에다 거점을 추적하기 위해 CIA와 접견이 예정된 상황이었다. 그는 캠프 앞에서 자살 폭탄 조끼를 터뜨렸고, 대 알카에다 작전에 투입되었던 주요 CIA요원들이 현장에서 사망했다.
극중에서도 캠프 채프먼 테러가 등장하며, 마야의 팀원들이 여기서 사망하는 것으로 나온다. 마야의 팀원들이 살해 당하면서 마야의 빈라덴에 대한 증오가 점점 집착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사마 가옥

사실 건물 자체만 놓고 보면 허름한 집 처럼 보이지만, 엄청난 중무장을 한 요새에 가까운 집이다. 사람과 담당의 높이 차이만 봐도 얼마나 엄중하게 지어졌는지 알 수 있다. 영화에서는 거의 완벽에 가깝게 재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슬라마바드 인근 교외지역에 지어진 가옥으로, 파키스탄 육군사관학교가 위치하며 경찰이나 군인들이 주로 사는 부촌 지역이었다.
이라크와 WMD
영화 내에서 오사마 가옥을 치자는 CIA에게 백악관 보좌진들이 오사마의 거주 증거를 차갑게 요구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특히 WMD 사건을 자주 인용하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라크 전쟁을 이해하여야 한다. WMD는 대량살상무기의 약자로, 미군이 이라크를 침공하는데 사용된 주요 명분 중 하나였다.
2003년 3월 20일, 이미 아프간에서 전투를 수행중이던 미국은 이라크로 고삐를 틀어 침공을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절차로 누가 결정했으며 왜 이라크를 친 것인지는 아직 까지도 논란이다.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미 행정부의 이라크 전쟁 명분은 크게 다음 세 가지와 같았다는 것이다.
- 사담 후세인 정권과 알카에다의 연계 의혹
- 이라크의 WMD(대량살상무기)의 보유 사실
- 이라크 국민의 해방과 민주주의 확산
전쟁 이후 각 명분에 대해 25년도까지 달성된 것을 정리해보았다.
- 사담 후세인과 알카에다의 직접적인 협력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 9.11 위원회의 2004년 조사 결과 협력 관계를 찾지 못하였다고 기술했으며, 이후 CIA와 국방부 내부 보고서(2008)에서도 둘 사이의 직접적인 연계를 확인하는데 실패했다.
- 사담 후세인은 민족주의에 기반한 철저한 세속주의자였다. 반면 알 카에다는 극단 이슬람주의 원리주의 단체로, 알 카에다의 입장에서는 사담도 제거해야 할 세속주의 독재자였을 뿐이었다. 사담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알카에다는 잠재적으로 이라크의 분열과 혼란을 초래하는 뿌리 뽑아야 할 반동세력이었을 뿐이었다.
- 반미라는 공통점에서 일부 접촉 시도는 있었을 수 있지만, 적극적인 테러 지원을 수행하지는 못했을 것 이라는게 현재의 중론으로 보인다.
- 이라크는 WMD를 보유하지 않았다.
- 이라크의 핵무장은 시도는 있었으나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다. 이미 걸프전쟁 이후 쇠락을 걷고 있던 이라크는 핵무장을 할 능력이 없었다.
- 과거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양측은 화학 무기를 이용해 화학전을 수행한 바 있고, 1988년에도 이라크는 자국 쿠르드인 거주구역에 화학전을 시도한 바 있다. - 그러나 1991년 걸프전 패배 이후 유엔 특별위원(UNSCOM)에 의한 사찰과 경제 제재 압박으로 WMD 프로그램을 실질적으로 폐기한다.
- 이라크에 민주주의가 도입되었지만 과정은 험난했으며, 현재까지도 정치적 불안정은 계속된다.
- 2003년 사담이 실각한 뒤로 미군이 치안 유지를 맡았지만 적은 수의 미군으로는 이라크의 치안 불안을 해소할 수 없었다. 2007년에서 2008년 사이의 이라크 내전은 미군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어떻게 봉합하는데 성공했지만, 부시 이후 들어선 오바마 행정부는 더 이상 이라크에 미군 지상 병력을 주둔 시키고 싶지 않았다. 2011년 미군이 철수한 신생 이라크 정부는 국내 정치적 불안 요소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 IS의 등장과 함께 두 번째 이라크 내전이 벌어진다. IS는 한 때 이라크 내 거대 도시인 모술, 팔루자와 같은 대도시를 점령하고 바그다드의 목전 까지 이라크 신생 정부를 밀어붙였다. 기세등등했던 IS는 곧 전세계 다국적군의 공습, 물자 지원에 힘입은 이라크 정부군과 민병대에게 격퇴된다. IS와의 분쟁이 종식되면서 겨우 유혈 충돌은 막은 상태이다.
- 2020년대에 들어서면서 내전 종식 이후 아직 까지는 선거 민주주의 체계가 형식적으로는 돌아가고는 있다.
이라크전은 이미 아프간전을 수행하던 미국에게 상당한 경제적 충격과 인명피해를 초래했다. 반면 이라크 전을 수행하면서 미국이 얻은 이익은 피해에 비하면 거의 전무했다. 그나마 반쯤 성공 했다고는 볼 수 있는 3번을 제외하고 (이마저도 미군 철수 이후 험난한 길을 한창 돌아갔지만), 1번과 2번은 철저한 정보 실패의 결과였다. 이런 엄청난 실패를 어떻게 세계 초강대국의 정보 기관들이 할 수 있었을까. 영화에서 지적한 WMD 사건은 바로 이를 지목한 것이다.
테러와의 전쟁의 진행양상을 보면서 미국이 반세기 전에 수행했던 태평양 전쟁과 정보전의 면모에서 약간의 유사성을 보았다. 둘 다 미국 본토가 갑작스럽게 공격받은 충격으로 시작되었고, 미국 문화와 이질적인 비 유럽 문명과의 전쟁이며, 다량의 정보실패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물론 태평양 전쟁은 대규모 국가간 총력전인 반면 테러와의 전쟁은 비대칭, 비정규-정규전이 혼합된 장기적인 사건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지만, 정보 당국의 “적군을 이해할 수 없음”에서 오는 공포감은 비슷했다고 볼 수 있다. 이오지마, 오키나와 전투 이후 일본의 충격적인 행동 양상(자살 돌격, 거주 민간인의 집단 자살 등)을 겪고 나서야 일본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수 없이 많은 보고서가 쓰여진 것처럼, 테러와의 전쟁에서 초기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야 미국의 대 중동 첩보 전략이 본격적으로 정립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살인의 추억과의 유사성
두 영화는 유사성이 꽤 많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추적극이고, 등장인물들은 매우 긴 시간에 걸친 집요한 수사로 인해 무기력해지기도 한다. 실패가 거듭되자 이내 광기에 가까운 집착을 보여준다. 물론 시대의 폭력성이 주요하게 비춰진다는 것도 포인트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살인의 추억에서는 끝내 범인을 잡지 못했지만, 제로 다크 서티는 모두 아시다시피 작전의 성공적인 수행으로 영화가 마무리된다.
같이 보면 좋을 것 같은 영화
- 바이스 - 당시 부시의 부통령 딕 체니를 다룬 영화. 이라크전쟁의 설계자라고도 볼 수 있는 장본인이다. 9.11 당시 미국인의 혼란과 이해할 수 없음, 공포와 분노가 어떻게 나타나고 움직였는지 과정을 볼 수 있다. 동 시기에 미국의 세계정책을 쥐락펴락하던 사람이니 함께 보면 좋을 것 같다. 영화 자체는 정치적 편향성 논란이 일기는 했으니, 감안하면서 보면 좋다.
- 워머신 - 마찬가지로 미국의 이해할 수 없음과 혼란의 도가니를 이번에는 아프간 전쟁에 파견된 미군 수뇌부의 시점에서 다룬 영화이다.
- 드론-넷플릭스 다큐멘터리
- 뮌헨 - 뮌헨 올림픽 직후 모사드 요원이 검은 9월단 관련된 테러 조직 관련자들을 제거하는 과정을 다룬 영화
감독 캐서린 비글로
K-19, 허트로커를 감독했던 감독